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노레 드 발자크 (문단 편집) == 생애 == 1799년 5월 20일 [[프랑스 제1공화국]]의 [[투르]] 지방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베르나르 프랑수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제정 시대의 투르 주둔군 병참 담당 군속이었고, 모친 안 샤를로트 로르 살랑비에는 파리 상인의 딸이었다. 부모의 나이차는 32살이나 되었고, 이들간에는 애정이 없었다. 본디 그가 태어나기 전 형(兄)인 루이 다니엘이 먼저 태어났으나 곧 사망했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가 [[이부형제|이부동생]][* 즉 어머니의 불륜으로 인한 사생아] 앙리를 편애하여 크게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발자크는 유모에 의해 양육되었다. 1807년에 방돔(Vendôme)의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6년간 수학하였는데 교육 방식이 엄격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식으로 교육한답시고 재정지원을 안해줘서 곤란에 처했다. 결국, 그는 학교나 학우들에 적응하지 못했고, 걸핏하면 처벌을 받고 징벌방에 갇혀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건강이 나빠져 집으로 돌아온 뒤 1년간 요양하였다. 이후 1814년 9월에 투르 중등학교에 2달간 통학하다가 아버지가 파리의 군수품 조달 회사 책임자로 임명되어 일가가 [[파리(프랑스)|파리]]로 정착. 발자크는 파리의 리세 샤를마뉴라는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마친다. 1816년에 소르본 법과대학에 입학하였고 1819년 1월에 법과대학을 졸업한다. 부모는 그가 공증인이 되기를 바랐으나 발자크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부모에게 작가의 재능을 증명하기 위해 2년간의 유예기간을 얻어 파리의 비루한 쪽방에서 작품 저술에 몰두한다. 그러다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의 생애에 대한 희곡 크롬웰(Cromwell)을 야심차게 저술하였는데 반응은 굉장히 나빴다. 한 대학 교수는 이것을 읽고 발자크의 모친에게 '''"아드님이 문학계에 발을 들이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데뷔작이 실패하고 결국 부모가 재정 지원도 중단하여 발자크는 본가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는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나폴레옹 [[동상]]에 이런 [[낙서]]를 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칼로 이룬 것을 나는 펜으로 이룰 것이다! 1822년부터는 가명을 쓰면서 상업소설, 통속소설이라고 할 만한 분야에 손을 대어 여러 편의 작품을 썼다. 이때부터는 로르 드 베르니 부인과 교제하며 조력을 받는다. 아울러 그의 육체적 경험의 첫 번째 상대이다. 그녀는 발자크보다 22살이나 많았고 모친과 이름이 같았다. 1836년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이 관계는 계속된다. 1825년부터는 다브랑테스 공작부인과 사귀기 시작하는데, 발자크의 인생을 보면 이렇게 문학적 조언자, 물질적 후원자를 해주는 여인이 항상 곁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후 인쇄업과 출판업에 손을 대지만 전부 실패하고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럼에도 쉼없이 많은 작품을 저술하였는데, 매일 집에 틀어박혀 [[수도복]]처럼 긴 옷을 입고 하루에 50잔 가량의 [[커피]]를 마시며 15시간씩 글을 썼다고 하며 그 빚 덕에 빚쟁이들이 들이닥치면 그대로 도망치곤 했다고 한다. 발자크는 20년동안 97권이라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진상에 편법도 서슴치 않았는데 일단 닥치는데로 원고 청탁을 받아와서 과거에 써놓았던 글들을 대강 짜깁기해 초본을 만들었다. 이걸로 원고료를 받아 챙기고 여유가 생겼을 때 새로 써서 교정쇄로 냈다. 늘 일을 2번 해야 했기 때문에 인쇄소 직원들은 발자크를 굉장히 싫어했다. 1830년에 <마법의 가죽(La Peau de chagrin)>[* 우리나라에서는 <나귀 가죽>으로 번역되기도 했다.]을 발표하여 이때부터 작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1832년부터는 훗날 결혼하는 한스카 부인과 교제하기 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1833년에 <시골 의사(Le Médecin de campagne) 외제니 그랑데(Eugénie Grandet)> 등을 발표. 여담으로 [[러시아 제국|러시아]]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도스토옙스키]]는 이 <외제니 그랑제>를 읽고 영감을 받아 저명한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을 쓰기도 했다. 1835년엔 <고리오 영감(Le Père Goriot)>, <서른 살 여인(La Femme de trente ans)> 등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자신의 작품을 하나의 체계속에 집대성하려는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1846년엔 한스카 부인이 임신하지만 사산하고 만다. 그리고 이 해에 ‘인간극’을 출간한다. 1850년이 3월에야 한스카 부인과 결혼을 한다. 그것도 그나마 그가 병약해진 모습을 보고 한스카 부인이 동정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5월에 파리로 돌아와 살림을 차리지만 이미 발자크는 와병중이었다. 1850년 8월 18일 며칠을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있던 그는 51세의 나이로 영면하고 만다. 같은 시대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그의 죽음에 대해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그가 동의했건 동의하지 않았건 인간극이라는 이 방대하고 비범한 작품의 저자는 혁명적인 작가들의 강렬한 혈족에 속합니다"라는 조사(弔辭)를 남겼다. 발자크는 자신의 작품 전체를 사회를 이해하는 도구로 삼고자 했고 철학적 사변이 두드러지는 풍자적이며 사실주의적인 그의 저서들은 오늘날 그를 대문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